— 60년이 지난 오늘 —
1964년 서울의 봄은 봄 답지 않았다. 해 넘어가는 석양 줄 끊어진 기타를 들고 끝없는G선 의 엘레지를 타는 우리들 모습이었다. 4.19 태풍이 휩쓸고 간 대학 컴퍼스는 쥐구멍 뚫린 듯 흉흉했다. 이때를 놓칠 세락 북한의 대남공작은 특히 학원가를 중심으로 치열했다. 이데올로기 흑백논리 시대였다.
대학 캠퍼스는 온통 헛간에 구멍 풇린 듯 남파 간첩이 포섭할 인재를 찾아 자신도 모르게 용 공집단에 명단이 올라있고 귀퉁이마다 술렁이는 혼란과 그리고 방황의 시간이었다.
무신론 실존주의 까뮤나 싸르트르가 지성을 과시하던 시절. 어디를 가도 ”이방인”의 망령이 그림자처럼 우리 의식을 따라 붙고 있었다.
그때 우리들은 어디에다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 였다. 어두울수록 좋은 침침한 다방 아랫 구석 담배연기 자욱한 음악 감상실이 유일한 쉼터였다. 어두울수록 편안함을 택한 어두운 박 쥐시대를 살고 있었다. 4.19를 전후한 우리 세대의 피잔 한 젊음들의 모습이었다.
그때 미국유학에서 돌아오신 김준곤 목사님은 중구 저동에서 학생 신앙운동을 시작하셨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다 목사님을 만났고 내가 했던 일은 <지성의 귀로>라는 팜플렛 같은 프라이어를 만들어 드리는 평범한 알바생이었다. 학생간사로 목사님을 도와 보필하는 모든 일은 문설같은 설교초안을 만들어 주시면 한글 문법에 맞추어 정리하는 일을 주로 했다.
그러다가 그해 1964년 1월에 “CCC편지”를 정기 간행물로 발행하게 되었다. 그때 표준으로 가리방에 초를 묻힌 초종이를 위에 대고 철필로 글자를 긁어서 프린트를 하던 때였다. 나는 그 시절 부터 요새 말로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저동 회관에서 1주에 한번 정기 집회가 열리고 학생회가 만들어졌고 지금말로 집회 순서지 주보를 Crusade라는 타이틀, 그때 “정신병 초기증세” 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글을 써서 올렸다 –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독선 이요 건 방진 자랑 삼아 올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곳도 대상도 없기때문에 여기에 한마디 올려 보는 것이다. 양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당시 최상의 질로 해보라는 문장가이면서 유명 설교가인 김준곤목사님의 뜻에 따락 동아출판사 사가 처음으로 독일에서 들여온 하이델 베르그라는 최신 인쇄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타고난 글 솜씨에, 시인 김현승과 친구이고 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다.
그당시 인쇄 형편으로는 최고 수준 고급인쇄로 “CCC편지” 를 발행했다. 그때 일반 교회 문 서중에 CCC간사였던 하용조목사가 온누리교회를 시작하고 <빛과 소금>이라는 초호화 잡지를 발행 한 것 말고는 내가 알기로는 최초의 기독교문학의 시도 같은 작은 시작이었다.
나는 그때 두가지 일을 했다. 한달에 2회씩 bi-weekly “CCC 편지”를 발행하는 일과 를 모집해서 지도하는 일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때 부터 Boy Scout를 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애들을 Boy Scout조직으로 묶어 놓으면 서로 도와주고 친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 단복도 멋이 있어 좋았지만 삼지를 펴고 외우는 3선서 12규율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는 표어가 좋았다. 반조직이 7명있고 반조직 위애 도반이 있었다. 도반이 모이면 대를 이룬다. 나는 반장, 도반장을 거쳐 대장으로 1966년 태릉잼보리 대회 김종필 총재가 되어 대회장을 할 때까지 끝을 냈다.
내가 조직했던 HCCC는 내 머리 속에 있던 Boy Scout 조직이었다. 그래서 반별 모임 대별 모임인 전체 모임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때 내생각은 앞으로 멀리 보고 이단체가 살려면 이를 뒷받침해서 연결지을 엘리트 그룹이 뒷받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국시대 통일신라를 이끌었던 “화랑도”같은 엘리트그룹으로 생각하고 그런 확신이 있었다.
순론으로 정리하신 목사님은 옛날 사랑방 같고 주막 같은 방의 세포조직 의 원본으로 CCC운동의 핵심 단위로 정리하셨다
나중에 이운동은 순운동이라는 미국 본부에서 CCC운동의 핵심이 된이라는 새로운 운동 국제조직으로 발전시켰다.
나는 Boy Scout조직 화랑도를 의식해서 만들었던 조직이었다. 초기에 이룩된 14000 조직 에 김준곤목사님도 좋아 하셨고 몇차례의 수련회도 적극 참여지도 하셨었다. 지금은 CCC한국 대표이자 국제CCC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박성민박사총재를 맡아 미주KCCC후신으로 활발하게 자라고 있다.
당시 지금도 그렇겠지만 소위 일류고교 6곳, 남자 경기 서울 경복 / 여 여자 경기 이화 숙명에서 학생들을 선발해서 조직이 되었다. 내가 충분한 지도는 못했을 지라도 HCCC 1기는 너무 훌륭한 성장을 이루었다. 한국의 정치. 경제. 과학. 외교. 복지. 제약분야에서 나라의 큰일을 담당하였고 자랑스러운 그룹인물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도 좋겠지만 당사자들의 사회적 정치적으로 루가 될까 싶어 숨겨두겠다.
물론 지금 HCCC기도 70대 중반을 넘어 노인들이 되었다. 그러나 1964년에 만들어졌던 그룹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모임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1964년 문예지에 이어 60년 지난 2024판 기념호까지 발행한다고 한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보람을 여기에서도 찾는다.
나는 평생을 대학 캠퍼스에서 구릅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이런 구릅은 본적이 없다. 그것은 단순한 조직체로서가 아닌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정”이라 할까 끈끈한 접학력 그 위에 위에 있는 무엇이다. 교회적인 용어로는 간단하지만 그것만도 아닌것 같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들의 인품은 고상하다. 아주 깨끗하다.
나는 이제 달려 갈 길을 거의 다 온 것 같다. 내가 한일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HCCC1기를 창설했다는 사건이다.
HCCC 1기들은 나의 꿈이요 비전이요 내인생의 보람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들 가슴에 내가 머물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강용원
2024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