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과수원

Spread the love

조경호

내가 태어난 곳은 대구이다. 말하자면 내 고향은 대구라는 말이다. 그런데 대구보다 더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그야말로 마음의 고향이 있다. 그곳은 경북경산의 와촌이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성장하여 대학 시절까지 거의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가곤 했다. 사촌오빠의 와촌 과수원이다.

1950년대 중반이엇으리라. 대구 초등학교에 다니던 꼬맹이 초등 1년생 무렵부터 무더운 여름이 오면 친척 조무래기들은 의례, 와촌 과수원으로 몰려가곤 했다. 지금은 대구시로 전입되었지만, 그 무렵에는 기차로는 30분, 버스로는 거의 1시간을 가야 하던 먼 곳이었다.

대구시 외곽에 있던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자주 있지도 않은 경산행 버스를 시간 맞추어 타려면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좁은 버스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만원이었기에 꼬맹이들은 앉기는커녕,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이리저리 밀리면서 가야 했다. 기차로 가면 하양역에서 내려서 다시 와촌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자주 다니지도 않는 버스 시간을 맞춘다는 것은 어려운 시기였다.

버스가 한 시간정도 달려서 내려준 와촌면이다. 온 힘을 다해 짐 보따리를 끌어내며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확 끼치는 논의 비릿한 내음이다. 사방은 온통 초록빛 논이다. 이어서 들려오는 것이 개구리들의 왁자지껄한 합창 소리인데, 엄청 시끄럽다. 그래도 팔을 벌려 숨을 크게 쉬면 정말 기분이 좋다. 와촌이라는 작은 면은 어찌 보면 씨족 마을이다. 거의 20, 30호가 못 되는 마을의 사람들은 ㅁ두가 인척으로 얽혀있다. 좁은 마을 황톳길을 들어선다. 마을 집들이 풍기는 냄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황토 흙냄새에 볏짚냄새를 더하고, 소죽 끓이는 냄새를 다시 더하고, 마지막으로 독한 곰방대 담배 냄새를 더했다고 하면, 비슷한 냄새가 되리라. 악기로 치면 높은 바이올린이 아닌 낮은 첼로의 느낌을 주는 쏴 하고 몸을 뚫고 지나가는 묘한 시골의 냄새다. 그런데 이런 지독한 냄새가 싫지 않다. 어른들은 이 냄새를 구수한 냄새라고 했다.

뜨거운 땡볕 아래로 다져진 황톳길을 따라.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황톳 길은 가끔 금싸라기가 박혀있기라도 하듯, 햇빛에 반짝였다. 마을의 낮은 흙벽 담은 진흙에 볏짚을 섞어서 만든 것인데, 키가 낮아서 나 같은 꼬맹이도 까치 발을 들면 집안 툇마루나 외양간이 보일 정도였다. 작은 마을의 골목길을 나서면 저 멀리 가므스레히 사촌오빠의 과수원이 보인다. 온 사방이 진녹색의 논밭 인데 과수원의 색만은 조금은 은회색을 띤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조심해야 한다. 당시에는 농지 구역 정리가 되지 않았던 터라, 논밭의 경계는 마치 미로의 거미줄같이 엉켜져 있었다. 좁은 논둑길을 바로 찾아 들어서야 한 다. 자칫 잘못된 다른 논둑길을 들어서면 과수원이 바로 앞에 보이는데도 엉뚱 한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 특히 보름달이 뜬 밤에는 맞는 논둑길을 찾기는 정 말 어렵다. 모든 논에 보름달이 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고수와 함께 가야 한다.

구불구불한 논둑길을 지나 과수원 문 앞에 다다르면 탱자나무 울타리의 냄 새가 향긋하다. 사촌오빠의 집은 과수원 가운데에 잘 지어진 그야말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다. 안채, 사랑채. 2개의 광, 돼지우리, 외양간, 행랑채 그리고 디딜방아가 있다. 특히 사랑채는 방 끝에 누각처럼 마루를 깔고 주위는 예쁜 나무로 난간이 장식이 되어있다. 보통 사극영화에서 대갓집에 손님을 맞이할 때 술상을 내가서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아늑한 공간이다. 누각의 지붕은 버선 발같이 기와의 모퉁이가 올라가 있어서 정취가 더 하다.

광 하나는 작은 규모인데 주로 농사지은 곡물이나 콩, 팥, 찹쌀, 곶감 등을 저장하는 곳으로, 항상 맹꽁이자물쇠가 걸려있었다. 다른 광은 상당히 규모가 크다. 이곳은 수확한 사과를 궤짝에 넣어 상품으로 내가거나, 지하에는 사과를 저장하는 곳이다. 많은 나무 궤짝과 볏단이 쌓여 있었고, 지하로 내려가는 입 구를 들여다보면 사과 향기에 취할 정도로, 짙은 사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행 랑채는 일꾼들이 머무는 곳이다. 옛날에는 머슴들이 머물렀으리라. 문짝은 너 무 낮고 방의 벽은 온통 담배 진으로 검게 찌들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방 에는 몇 개의 목침이 뒹굴고 있었다. 디딜방아는 위에 걸린 밧줄을 잡고 널뛰 듯 발로 방아나무를 디디면서. 절구에 담긴 곡식을 찧는 식이었다. 꼬맹이들은 키가 작아서 밧줄을 잡을 수가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디딜방아를 지나 집 뒷문으로 나가면, 앞에 나타나는 것은 바로 ‘새보’이다. 새보는 사촌오빠께서 과수원에 댈 물을 마련하려고,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만 든 보다. 그런데 이 보가 너무 명물이다. 길이는 약 100m가량 되고, 폭은 넓 은 곳은 10m 좁은 곳은 5-6m 정도이니, 얼마나 멋진 수영장인가. 폭이 넓은 끄트머리 쪽은 깊이가 2m 정도로 깊지만, 다른 곳의 물 깊이는 1-1.5m 정도 이다. 물이 땅에서 솟아나다 보니, 여름에는 물이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겨울 아침에 새보에 나가면, 물 위로 나즈막이 물안개가 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욱이 새보 곁에는 둑이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막아주고, 둑을 넘으면 상 당히 넓은 모래사장(강변)이 있다. 낙동강 줄기가 조금씩 흘러서 발목까지 물 이 흐르기도 한다. 모래사장을 건너면 야트막한 산이 자리 잡고 있어서, 강변 에서 놀다가 산에 오르면, 멀리 낙동강 줄기가 은빛처럼 흐르고 있었다.

새보는 조무래기들의 너무 좋은 멱 감는 수영장이 되고, 해 질 무렵이면 동 네 아낙들이 종일 일하고 땀에 전 몸을 씻어내는 곳이 되기도 한다. 새보의 제 일 끝부분에는 갈대가 자라서 여인네들이 숨어서 몸을 씻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새보에서 멱을 감고 둑을 넘어 백사장에서 뒹굴다가 산으로 올랐다. 산딸기 를 따 먹은 입술에 붉은 칠을 한 채로, 조무래기들은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내 려온다. 부엌에서 일하는 언니가 내가는 참에는 간 고등어구이와 뚝배기 위로 솟아오른 계란찜도 있었다. ‘와, 점심 맛있겠다.’ 잔뜩 기대로 부풀어서 고모가 밥 먹으라는 소리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경산과수원 사촌오빠 집

‘’밥 먹어라.” 우리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주르르 안방 대청마루로 달려갔다. ‘오잉! 이게 뭐람!’ 우리의 점심 밥상의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커다란 놋 양푼에 가득 담긴 보리밥, 그 위에 꽂힌 숟가락 몇 개, 그리고 열무김치도 없고, 된장찌개도 없다. 수박껍질 안쪽 흰 부분만 긁어서 대충 고춧가루만 뿌 려 만든 수박 나물이 전부였다. 젓가락도 짝이 맞을 리가 없다. 처음에는 못 먹을 것 같던 한심한 점심상도 시간이 지나자, 달려들지 않으면 금세 보리밥이 동이 나기에 놋 양푼에 빠른 속도로 숟가락을 들이밀 정도로 익숙해졌다. 밤이 되면 모기향을 피우고 감자, 옥수수 그리고 수박은 제대로 먹을 수 있었다.

시골의 여름밤 하늘은 그야말로 별이 쏟아질 듯, 찬란하다. 그믐날이 다가오 면 달이 보이지 않아서 정말로 밤은 어두웠다. 장난기 많은 작은 오빠는 저녁 을 먹은 후 조무래기들을 데리고 강변으로 나갔다. 달이 없는 어두운 밤, 강변 에는 벌레 소리와 잔잔히 흐르는 물소리뿐, 정말 고요했다. 이 분위기에서 시 작되는 오빠의 귀신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던 조무래기들은 “으악 !”

하는 오빠의 소리에 너무 놀라서 오줌을 잘금잘금 싸기도 하고, 울음을 터뜨리 는 놈도 있었다. 오빠가 즉석에서 지어낸 귀신 얘기지만, 조무래기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모두 오빠의 옷 한 자락씩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온다. 마치 소 대장을 따라 들어오는 패잔병 모습이었다.

밤이 깊어 자야 할 시간이다. 사랑채에 고모가 던져준 것은 두 어장의 삼베 이불뿐이다. 베개가 제대로 있을 리 만무하다. 차가운 방바닥에서 서로 이불 한 자락이라도 발을 넣으려고 잡아당기고 있다. 그야말로 흥부네 가족의 모습 이다. 그래도 낮 동안 멋대로 뛰어다닌 터라, 모두 잠에 곯아떨어진다. 한밤중 문득 눈이 떠지면, 한지 여닫이창에 비치던 푸른 달빛이 어찌나 신비롭던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거꾸로 자는 놈, 남의 얼굴에 다리를 올리고 자는 놈, 정 말 가관이었다.

한낮의 재미 중 하나는 메뚜기를 잡는 일이다. 둑길을 따라 내려가면 풀숲에 팔딱거리는 메뚜기가 있다. 이놈들은 풀 색깔과 거의 같아서 바로 앞에서도 못 알아보는 경우도 많았다. 기다란 잎줄기에 각자 잡은 메뚜기를 꾀어들고 집으 로 달려오면 일하는 언니가 가마솥에 들기름을 두르고, 소금을 쳐가며 메뚜기 를 구워준다. 사내놈들은 그래도 몇 마리 먹지만. 나 같은 어린 막내는 고작 한, 두 마리 얻어먹는 것이 고작이다. 고소하던 메뚜기의 맛!

한여름에 밤중에 가끔 센 비바람이 몰아칠 때가 있다. 이튿날 아침이 되면 우리는 모두 망태기 하나씩을 메고, 바람에 떨어진 사과를 주우러 나간다. 양 이 엄청나다. 이런 날은 해 질 무렵이 되면 동네 아낙들이 소쿠리를 기지고 와 서 떨어져 흠이 생긴 사과를 받으러 온다. 이런 사과가 더 맛이 있어서다.

개학날이 돌아오면 우리는 모두 사랑채 누각 마루에 배를 깔고 누워. 밀린 방학 숙제를 해야 했다. 모범답안지는 모두가 그대로 베껴 썼지만, 아무도 탓 하지 않았다. 이윽고 대구 집으로 돌아가는 날, 우리는 고모가 조금씩 싸준 곡 물 보따리를 안고, 둑길 10리를 걸어서 하양 기차역으로 향했다. 버스는 다니는 시간도 일정치 않아서 하양 역까지 가서 기차를 탔다. 당시의 기차는 그야 말로 칙칙폭폭 기차다. 기차 창밖에서는 대여섯 개의 사과를 그물망처럼 생긴 주머니에 담아서 팔고 있다.

“능금 사이소. 맛있는 능금 사이소. 찐 달걀도 있어예”

딱딱한 나무 의자와 더 두꺼워 보이는 나무 등받이에 흔들리며, 그리운 집으로 간다. 대구역에 내리면 모두 눈에 검정 안경테를 두르고 있었다. 목탄 연기가 눈가에 계속 묻은 것이다. 아무도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눈에 검은 테 안경을 썼으니 말이다.

꿈에도 그리던 이 와촌 과수원은 사라지고 없다. 사촌오빠가 대구에서 사업을 할 생각으로, 이 아름답던 과수원을 팔아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내가 50대 나이에 들어섰을 때 대구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어서 가보자 와촌으로.’ 택시를 타고 와촌을 얘기하자, 기사 분이 지금은 대구시의 외곽이란다. 어렵게 도착한 옛 과수원은 너무나 변해 있었다. 맑은 물이 항상 솟아나던 “새보”는 물이 말라버려서 이제는 연탄재를 버리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사과 향으로 넘쳐나던 큰 사과 광은 젖소를 키우는 장소로 변해서 악취가 나고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작은 규모의 과수원은 왜 그리 초라해 보이던지. 주민들은 “새보” 물이 마른 것은 주인이 바뀌어서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정부에서 낙동강 줄기 물길을 바꾸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차라리 가지 말 것을… 첫사랑은 늙어서 다시 만나지 말라는 말이 맞나보다.

나는 여전히 와촌 과수원이 그립다. 잠이 안 오거나, 무서운 치과병원 의자 에 앉았을 때, 나는 눈을 감고 와촌 과수원을 떠올린다. 가슴 가득 햇살이 들어와 안긴다. 그리운 내 마음의 고향이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