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의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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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우

제주에 내려온지 어느새 5년째. 은퇴 후 제주에 사는 것을 로망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지만, 나의 제주살이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 후 제주 4.3항쟁 와중에 집사람 친척 중 한두 분이 희생되자, 장인을 포함한 3형제가 고향을 떠나 일본에 정착하였다. 장인은 딸들이 일본 남자와 엮이는 것을 절대 볼 수 없다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모두 한국으로 떠밀어 보냈다. 맏딸인 집사람을 시작으로 세 딸 모두 서울에서 1년 어학연수 후에 해외동포 입학 특례로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집사람 한국어 실력은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힘겨운 수준이었다. 그런데 내 가까운 친구가 간간이 집사람의 부족한 한국어를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후임으로 나를 소개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의 제주와의 첫 대면은 신혼여행이었다. 신혼여행이라기보다 집사람 친척들과 이웃 에게 인사하는 것이었다. 조촐하지만 족히 이틀에 걸친 통과의례가 피곤했던 탓인지, 제주의 풍광 같은 것은 그다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은퇴를 전후하여 이러저 러하게 그려본 노후생활의 그림 속에도 제주살이는 들어있지 않았다. 집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몇 년 전 장인께서 제주에 돌아와 뼈를 묻겠다고 선언하시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70년 넘게 일본에 사셨지만 귀소본능은 어쩔 수 없으신가보다. 그간 두 처제가 일본에서 부모님 이웃에 살면서 보살폈으니 이젠 우리가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 친아버지를 나이 여섯에, 어머니를 고3 때 여읜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장인이 50여년 전에 제주에 밭을 사서 조성한 감귤밭이 있었다. 그간 멀고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들이 손을 바꾸어가며 경작해 왔으나 근년에는 관리해줄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농산물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품종개량이 안된 감귤은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수확도 예전 같지 않은데다 농사일 품삯은 해마다 올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수년 전 감귤밭을 가로질러 애월과 조천을 잇는 마지막 구간 도로 공사가 시작되면서 경작면적이 거의 반토막이 났다. 이런 상황에서 졸지에 집사람과 내가 과수원을 떠맡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장인. 장모는 낙담하셨으나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격리의무가 풀리는대로 오겠노라고 몇 번이나 확언하셨다. 헌데 격리 상황이 해를 거듭해 이어지고 장인이 90세를 훌쩍 넘기면서 거동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수 십년간 거의 매일 아침 해오시던 동네 골목 청소를 중단하셨단다. 드디어 코로나가 진 정되었으나 도꼬-제주 직항이 열리기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신다. 최근 한 두 개 저가항 공사가 금년 하반기에 직항을 재개할지 모른다는 소식이 들린다. 집사람은 항공사의 휠체어 서비스가 제대로 제공될지, 부모님의 제주 정착이 과연 순조로울지 걱정이 커 지고 있다.

우리가 이곳에 이주한 후 한 해에 고작 두어번 찾아오던 서울 사는 큰 딸 니가 근래에 부쩍 제주를 자주 내려온다. 그런데 3의 관심은 부모보다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 똘똘 이인 것 같다. 3년 전 누군가에 의해 과수원 돌담 밑에 버려졌던 놈이다. 부슬부슬 봄 비가 내리던 3월초 택배상자 속에서 울고 있던 생후 한두달 되었을까 하던 놈이다. 정 신없이 나대지만 제법 머리가 있는 것 같아 똘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두 살 이 되면서 제법 준수하고 점잖아졌다. 이곳 지인들에 의하면 제주에 흔히 보이는 진돗 개 믹스견일 거란다.

똘똘이는 요즘 J가 만드는 동영상 모델 일을 제법 잘 해내고 있다. 동영상 제작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는 J가 과제물로 제출하기 위한 것이다. 수시로 휴대폰을 셀카봉에 고 정하고 감귤밭 잡초 위 혹은 농가주택 데크에 앉아있거나 잠자고 있는 똘똘이를 30분 이고 한 시간이고 계속 촬영한다. 이런 유튜브를 누가 볼까 싶지만 많은 이들에게 적 잖은 힐링이 된다는 것이다. 힘겨운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나 도시생활에 찌든 어른 들에게도.

J가 유튜브 채널을 열게 되면 우리 감귤밭을 고정 배경으로 하겠단다. 그러니 감귤밭 에 적당한 이름을 하나 지어달라고 한다. 그런데 일찍이 이 감귤밭은 이름이 있었다, 나운(祭雲, 한라산 구름)농원이라고. 네이버 지도에서도 검색되어 나온다. 나운은 장인을 대신하여 과수원을 관리하던 집사람 할아버지의 필명이다. 할아버지는 일평생 한량으로 사시면서 서예와 한시에 능하셨던 것 같다. 國展에서 입상하시기도 했다고 한다. 詩를 읽을 줄 아는 자식이 없어서 어떡할까 했는데 -. 하시면서 두어 개 한시 액자를 집사람과의 결혼 선물로 주시기도 했다.

농원이라고 하기엔 남세스런 규모지만 이는 나운농원 이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아마도 詩的이고 목가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산 정상을 희롱하며 유유히 노니는 흰구름이나 산 허리며 골짜기를 흐르는 몽환적인 안개구름 같은 – 하지 만 한라산은 이렇게 평화롭고 여유로운 모습을 그리 쉽사리 보여주지 않는다. 한라산 의 구름은 세차게 비를 뿌리며 어둡고 험하고 거센 얼굴로 다가오기 일쑤다.

오랜 옛날 여러번의 화산분출로 형성된 한라산은 제주도의 전부라고 할 정도다. 이곳 척박한 땅에 생계를 위해 돌과 바람을 숙명처럼 안고 씨름하며 가흑한 부역에도 시달리던 토박이들의 고단한 삶이 이어져 왔다. 바다에서는 수많은 뱃사람들이 거친 풍랑에 휩쓸려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외침도 있었다. 몽고의 침입에 마지막까지 버티다 산화한 삼별초 항쟁에 뒤이은 제주 지배 100년. 아직도 산재해 있는 일제 치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주요 군사시설 잔재들. 임금님의 노여움을 사 땅끝으로 내쫓긴 많은 유배자들의 인고의 한숨. 기적같이 다가온 건국을 전후한 부질없는 편가름으로 안타깝고 허망하게 쓸어져 간 숱한 4.3항쟁의 주검들. 靈山이라하여 해마다 산정에서 국태민안을 비는 山祭를 지냈다는 한라산의 구름은 이것들 모두를 똑똑히 목도하였으리라.

집사람 할아버지가 바라본 한라산 구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떤 생각으로 본인의 필명을 나운이라 지으셨을까? 한라산 정상에 걸친 구름처럼 세상을 넓은 시야로 내려 다 보며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는 예지를 가지셨을까? 아들들을 모두 일본으로 보내고, 큰아들은 조총련에 맞서는 民團의 간부로 오래 활동하였다. 그런데 집사람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종종 외롭고 한스러웠을지 모르는 내 아버지의 상상 속 마지막 모습이 오버랩되곤 한다.

아버지는 충청도 소도시의 면사무소 말단직원이셨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인천 앞 먼바다 이작도라는 섬 초등학교에 선생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해 가셨다. 마땅찮아 하시는 어머니를 딱 1년만 살다 오자고 어렵게 설득하셨단다. 월급이란 학부모들이 수확하여 조금씩 가져다 주는 보리,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이 전부였다. 섬 아이들을 10년 넘게 성심껏 가르치던 어느 여름날 북한 군함이 선착장에 정박하고 군인들이 학교 건물을 막사로 쓴다며 점유하였다. 6.25가 발발한 것이다. 그런데 번갈은 후퇴와 수복의 와중에 누군가 밀고를 한 모양이다. 인민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육지에 호송되어 얼마간의 옥고를 치르셨다. 휴전을 몇 달 앞두고 풀려나신 후에는 가족들을 섬에 남겨둔 채 홀로 강원도 산골의 한 초등학교로 부임해 가셨다. 그러나 옥고 때문인지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객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으신 것이다.

2005년 우리 정부는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했다. 서로를 할퀸 상처를 어루만지고 화해의 포옹으로 밝은 미래를 열어가자는 바램에서, 그래서 동북아와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기여하고자. 하지만 또다시 불어닥친 신냉전 기류와 격화된 한반도의 이념 대립으로 그렇게 갈망해온 평화는 더 요원해진 듯 싶다. 이해가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길목에 제주도는 여전히 아픔과 갈등의 섬으로 떠있다.

집사람과 나는 최근에 J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주문하였다. 한라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나운농원 완만한 언덕에 새로 지을 집과 기존 돌집 내부 리노베이션을 설계하는 것이다. 집 지으며 10년을 늙는다는데 이 나이에 집을 짓다니! 애초에 제주살이가 길어야 10년 아니겠냐던 집사람이 돌변하여 새 집 짓는데 흥분되어 있는 것이 사뭇 놀랍다. 언젠가는 이가 나운농장의 주인이 되어있을까? 그 즈음 J가 바라보는 한라산 정상의 구름은 오늘보다 더 해맑고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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