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달, 한해 한번 쯤은 내 존재의 제로점에서서 감사와 반성과 각오를 새롭게 다짐하는 시간이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게재합니다.
어느 성직자, 목사의 인간적인 부르짖음의 애타는 절규를 함께 나눕니다.
“하얀 박꽃, 소복(素服)입고 피고 지는 흰 구름 하늘 위에…. 향기 나는 추억 속에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리움을 안고…”.”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
“5천만의 가슴 속에 이 한 편의 CD 메시지를 새겨 드리고 싶습니다.”
(고 김준곤 목사님의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의 CD를 다시 읽으며,
이 한해의 인생사색(人生思索)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며 이 글을 드립니다.)
하얀 박꽃, 소복(素服)입고 피고 지는 흰 구름 하늘 위에 이 한 편의 CD를 들어 보십시오.
계획하는 일마다 원하는 뜻대로 너무도 쉽게 잘 풀려가고 있을 때, 너무도 행복해져, 행복의 정상에 취해 있을 때, 인간의 본연의 제로점에 서서 자신과 인생을 미리 보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이 한 편의 CD를 꼭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인생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 두 번 돌이켜 살 수 없는 생애에, 누구에게나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거칠고 바쁜 삶에 지쳐 감정이 메마를 때, 느낌마저 숨을 쉬지 않을 때, 전 생애를 바쳐 사랑과 생명, 비전의 메시지로 우리 세대를 깨우고 있는, 삶의 의미가 희미해져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김준곤 목사님의 부드러우면서 날카롭고, 섬세한 필치로 인생이 목 마를 때, 실패하고 낙심 속에 있을 때,
고백처럼, 통곡처럼 나와 하나님, 생명과 그리스도, 죽음과 영원에 대하여 심한 좌절로 죽고 싶을 만큼 외롭고 고독할 때,
목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간이면서 성직자로서, 병실에서 두렵고 초조할 때,
그리고 한 가족의 아버지로서, 절절한 눈물로 적셔 쓴 생명언어의 대화, 이 한 편의 CD를 들어 보십시오.
눈에 확실하게 보이고 손에 잡히는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일이 너무도 잘 되고,
고난을 서로의 것으로 나눌 줄 알고, 예수 생명 사랑을 함께 전하는 마음이 굳어져 철판을 깔고 살 때,
귀한 분에게 꼭 드리고 싶은 한 편의 CD입니다. 부드럽고 고운 심장까지 시멘트 콘크리트 돌이 되어버린 마음에도, 들으신 후에 그리스도를 전하고 싶으신 친구들께도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녹이 슬어버린 마음에도,
사람이면 누구나 가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에 생명의 소중함을, 하늘 끝까지 교만이 치솟았을 때도,
미리 알고 사는 후회 없는 예지(銳智)를 서로 함께 얻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인간의 제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이 한 편의 CD를 꼭 들어 보십시오.
1998년 9월 | 박꽃처럼 하얗게만 살고 간,
김신희 간사를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향기 나는 추억 속에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리움을 안고….
전 한국대학생선교회 미주사역 대표 강용원 드림.
김준곤목사님의 딸의 죽음에 대한 애끓은 사랑의 고백
내 딸 신희는 만29세를 일기로 세 살과 다섯 살 난 두 딸과 남편을 남겨놓고 주님의 부름을 받아 1982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어쩌다 늦게사 발견되어 1981년 12월 10일 S병원에서 개복수술을 받은 때는 이미 말기 위암이어서 집도의의 말에 따르면, 그냥 덮어 버릴까 하다가 수술을 했는데, 위와 비장 전부를 몽땅 잘라내고 간장 일부와 췌장 일부까지 절제해버리고 소장 일부를 잘라서 대용 위를 만들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나고 난 뒤 집도의는, 수술 자체는 성공적이지만 5,6개월 이상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생존 가능성이 있느냐고 했더니 10만분의 일, 100만부의 일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 뒤 병리검사 결과 전이는 없다고 들었을 때에 우리 가족은 집도의의 말을 전적으로 의심했다. 그렇게 죽을 것을 확신하면서, 산 사람도 그 만큼 자르면 죽기 쉽다는데 구태여 그런 범위로 꼭 잘라야 했던가 하는 것이 못내 한이 되었다.
회복실에서 입원실로 옮겨진 신희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으며, 코에는 호스를 끼고, 세 개의 주사바늘을 꽂고 있었으며, 요도에도 호수를 끼고 있었다. 어느 책에선가 대학병원은 환자들이 생체실험의 희생이 되는 경우도 많다고 읽은 적이 있는데, 마치 신희의 모습은 실험실 속의 이간 같아 보였다.
위암4기의 극한 고통
신희는 가냘프고 순하고 얼굴도 곱고 공부도 잘하고 마음과 성품은 더 고와서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였다.
30년을 키웠지만 없는 것처럼 조용하고 저만치 호젓이 미안하게 태어나 사는 아이처럼, 태어난 지 3개월만에 광마(狂馬)처럼 뛰는 털털이 만원버스를 타고 네 시간을 가는 동안 많은 사람은 멀미를하고 아우성인데도 신희는 쌕쌕거리며 예쁘게 잠을 잤던 고마운 기억이 있으며, 하루 종일 나와 내 아내가 학교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집보는 아이가 신희를 입술이 마를 정도로 굶겨놔도 울질 않아서 젖을 못 얻어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걱정을 안끼치려고 그런건지 아무리 아파도 꾹 참아버리는 그 성격이 암을 4기가 될 때까지 참아버리게 한 것이다.
수술한 날로부터 167일 동안 다른 암환자들은 단속적(斷續的)으로 통증이 온다는데 신희는 끊임없이 육체의 극한 고통을 받다가 갔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신희는 수술받은 직후부터 어느 간호원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암인 것을 부모님이 모르게 할 수 없는지 걱정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신희는 끝내 자신의 병명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을 안하고 모르는 척했다.
끊임없이 토하고 국물만 먹어도 장이 유착되는데다 장 전면에 퍼진 암 때문에 장기능 마비가 되어 아무리 관장을 해도 보름씩 변이 차고, 가스가 차고, 나중에는 복수가 차서 배가 터질 것 같은 팽만감에다 간 장애로 호흡 곤란까지 겹쳤으며, 다리뼈가 쑤시고 아팠을 것이다. 집에 있을 때, 깊은 밤이 되면 식구들에게 방해가 안되도록 텅 빈 응접실에 혼자 몰래 나와서 그 무서운 복통을 참느라고 몸을 비틀며 울면서 신음하던 것을 밤마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오랜 투병 기간 동안 밤이면 혼자 울어 눈이 부었는데도 누구보다 먼저 세수했으며 식구들이 보는 데서는 결코 울지 않았고 너무나 태연했다. 문병온 사람들이 울어도 신희는 일부러 태연했다.
우선 변을 좀 빼내기 위해 전주 예수병원에서 장 수술을 받았는데, 최후의 한 달 동안은 인공으로 만든 위 밑에 생긴 유착 때문에 쓸개즙과 위액을 위로만 토해내어 물마시는 일조차 영원히 문을 닫아야 했으며, 장을 꺼내서 만든 항문조차 별 의미가 없게 되어 항문도 영원히 문을 닫은 셈이다.
목밑의 어깨 쪽에다 주사를 꽂고 심장에 직접 주입하는 영양주사만으로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보충 주사를 맞기 위해 간호원이 주사 바늘을 들고 혈관을 찾느라 열 번, 스무번 바늘을 찔렀다 뺐다 해야 했다. 신희는 본래 약하기는 했지만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편이었다. 그러나 복부에만은 다섯 번씩이나 수술을 받았으니 난도질을 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맹장 수술, 분만 때 받은 두 번의 재왕 수술, 그리고 위암 수술, 또 한번의 장 수술이 그것이다.
체중이 26kg까지 내려간 자기 몸을 만져보고 상처와 주사바늘, 코에 꽂은 호스, 복수를 뽑기 위해 호스를 꽂아놓은 배를 만져보고는, “엄마, 내 몰골이 말이 아니지?” 하며 쓸쓸한 웃음을 짓는 것을 볼 때, 가슴이 꽉 메어왔다.
거절당한 기도
신희의 가장 큰 아픔은 어린 두 딸의 문제였다. 장마에 햇빛나듯 30분만 아픔이 멎으면 햇빛나는 창가 의자에 앉아 두 아이를 안고, 엄마가 나으면 동물원도 가고 식당도 가자고 숱한 약속을 하면서 속으로는 눈물을 참으려고 혀를 깨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신희가 눈물을 안보이려고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모른다. 잊어비리려고 그랬는지, 우리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는지, 특히 두 아이 이야기를 일체 함구해버렸다.
어느 날 오후에는 꿈을 꾸었는지 “수연아 ”(둘째 딸 이름)하고 부르는 것을 듣고 옆에 있는 엄마가. “신희야, 왜 그러니?” 했더니 “아니.”하고 패해버리는 것이었다. 또 어느 날은 옆에 있는 엄마에게 “엄마, 아이들 보고 싶지 안어?”하고 물어왔다. “아이들 보고 싶으면 데려올까?”했더니, “아니.”하고 또 피해버리더란다.얼마나 못잊어 보고 싶은 아이들이었을까? 신희가 두 딸을 예뻐하며 키운 정성은 유별났었다.
전주 예수병원 병실에서 내다보이는 4월의 개나리꽃 동산은 아름다웠다. 그날 오후 신희는 한 시간쯤 특별히 기분이 좋아 있었다. 그때 윤희가 와서 산에 갔던 이야기며 재미나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대학 시절을 회생했는지 기분이 좋아져서 일어나 않더니 내 손목을 갑자기 꼭 붙잡고는“아빠, 나 살고 싶어요. 살 길이 없을까요?” 하는 것이다.
신희의 여명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씰 박사에게서 선고받고 나는 신희의 신앙을 준비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터라 이때다 싶어 말을 꺼냈다.“신희야, 너 주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네 남편과 두 딸에게는 남길 말도 녹음해둬야 하겠다. 네 딸들의 양육은 조금도 염려마라.”
“아빠, 고마워요. 사실은 진작부터 그 일을 부탁드리고 싶었지만 미안해서 말씀 못드렸어요. 내게는 죽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다만 주님을 위해 별로 한 일이 없는 것이 걱정일 뿐이에요. 그런데 고통이 무서워요.” 우리가 그날 기도회를 가질 때 신희는 성령충만하여 빛나는 얼굴로 영감에 찬 기도를 드렸다. 구구절절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주님, 만일 다시 살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면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주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어떤 잔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마시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싶습니다. 내 고통과 눈물이 기도가 되고 찬송이 되게 해주십시오. 고통의 잔은 감당할 힘이 없사오니 주님이 책임지고 감당케 해주십시오.”
신희의 최대의 공포는 참을 수 없는 극한 고통이었다. 진통제들의 잘 듣지 않아 몰핀을 써야 하는데 말기 암환자에게는 몰핀도 듣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아 의사들은 최후까지 몰핀 쓰는 일에 인색하여 많은 암환자들이 죽기 전 일 주일 정도는 거의 광란 상태로 들어간다고 한다.
신희가 고통을 참는 것을 보면, 이마에 식은 땀이 배고 두 발과 두 손목을 비틀고 온 몸을 비틀며 주님을 부른다. 나중에는 신희는 누워서 기도하고 나와 내 아내는 끊임없이 신희의 손목을 잡고 신음 같은 기도를 했다.
신희가 토할 때마다 나는 내 죄를 창자까지 토했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주님과 신희를 번갈아 부르며 숨쉬듯 기도했으나, 내 생애의 가장 애절한 기도는 무참히 거절당했다.
피묻은 고백
어느 날 나와 내 아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순종과 수락을 결심하면서부터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왔다. 모세의 40년 간의 기도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인데, 하나님은 느보산 꼭대기에서 요단 건너 땅을 바라만 보게 하시고, “너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절을 모세는 생애 최후의 선물로 받았다. 바울에게도 세 번의 가시를 제거해달라는 기도가 거절되었다. 작은 겟세마네에서 나의 잔은 피보다 쓰다. 주님은 나의 가장 소중하고 소중한 것을 기어이 빼앗아가 버렸다.
나는 그 주님의 뺏는 손보다 다른 손에 준비한 것을 보아야 한다. 신희를 빼앗아간 다른 손에 준비된 영원한 소망이 전보다 총천연색으로 보인다. 주님의 절대 사랑과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힘을 주실 것에 대한 신뢰와 신앙을 나는 다시 확인해야 하는 과제 앞에 서게 되었다. 아비된 자로서 열두 번 신희를 대신하고 싶었지만 고통과 죽음만은 대신할 수 없는 것, 오직 주님만이 신희를 대신할 수 있다.
신희와 신희 남편과 나와 내 아내는 그렇게 기도했다. “주여, 기도할 힘도 없고 믿음도 심지어 꺼져갑니다. 감사와 찬송을 악마가 빼앗아고 있습니다. 살 힘도, 죽을 힘도 없습니다. 병과 싸우고 고통을 참을 힘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시련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신 책임져주십시오. 물 속에서 건지듯이 불속에서 건지듯이 당신이 성령으로 내 대신 기도해주시고, 믿게도 해주시고, 감사도 찬송도 주십시오, 나는 이미 죽었고 내게 사는 것은 주님뿐이며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죽였사오니 나와 죽음과 상관없게 하소서. 신희의 전폭을 대신해주십시오. 사는 것도 주님이고, 죽는 것도 주님입니다. 이 싸움은 당신의 싸움입니다. 이 죽음은 당신의 죽음입니다.”
교환된 삶, 산 제사를 드리는 삶의 비결을 우리는 소유했다. 십자가만 바라보는 절규, 주님의 절대사랑을 신뢰하고 뿌리째 송두리째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전천후 전인구원을 확신하는 이 피묻은 고백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성령이 하신 것이다. 인간의 종말에서 하나님은 시작하고 우리는 거꾸로 사는 영점 이하 수의 가산(加算)을 살아야 했다. 주님은 살아계셨다. 주님은 사랑이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이다.
내 딸이기 이전에 주님 딸이다. 내가 사랑하기 보다 주님이 더 사랑하신다. 그래서 주님은 신희가 이 세상에서보다 천국에서 더 필요하셔서 더 좋은 곳으로 최선의 것을 예비하시고 높이 쓰시려고 특별 고통 코스로 특별 연단을 시켜 특별히 불러가신 것이다. 그런 주님을 나는 죽음만큼 진실되고 순수하게 찬송한다. 신희의 끊임없는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 영광 돌리고 주님을 찬송하게 하소서.”였다.
꽃 속에 잠드는 봄나비같이 엄마나 아빠가 기도만 하면 엄마 품에 쌕쌕 자는 아가같이 신희는 극한 고통을 받다가도, 우리가 기도만 하면 주님 품에서 쌕쌕 평안히 잠드는 것이 너무도 인상적이고 역력했다.존재조차도 정지된 제로점에서 신희의 평생 기도는 시집 식구들의 복음화였는데, 지금은 시집 식구 의 4촌 6촌들까지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 신희는 그의 죽음으로 주께 영광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병원마다 신희는 모범 환자로 소문났고, 그의 장례식 때 참석했던 내사위의 두 후배는 그날 장례식을 보고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고 들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신희는 협동간사를 포함해서 30년 간의 C.C.C. 간사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 처음 죽는 케이스다. 아빠가 하는 일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경하며 아빠를 가장 사랑했던 내 딸. 그리고 깨끗하고 곱게 생기고 그리고 가냘픈 내 딸이 그리고 가혹한 고통 속에 죽어야 했던 이유는 주님만이 알고 계신다. 나는 그 잔을 감사하게 마셔야 한다.
주님만이 대속해주시지만 신희는 어느 높은 별 아래 태어나 분명히 누군가의 고통과 질병과 죄와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간 속죄양같이, 한 알의 밀알같이 제물이 된 것 같다. 나와 내 가족의 죄와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대신한 딸, 지금은 고통과 슬픔이 끝나고 찬란하고 황홀한 곁에서 천사들과 뭇성도들의 찬송 속에서 안식과 희락과 사랑과 행복을 누리고 있을 신희, 나도 후일에 생명이 끝나고 주님 품에서 깨어날 때, 네가 가장 먼저 꽃다발을 가지고 나를 환영나오겠지…
세상 떠나기 전 날, 신희는 쌕쌕 잠든 상태에 있다가 식구들 하나하나에게 그리고 맑게 평화스런 눈동자로 미소를 지으면서 반갑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같이 기도할 수 있겠니?”하면, “주여…..”하고는 언어 장애를 알리느라고 손가락으로 입과 머리 부분을 가리키며 잘 안돌아간다는 신호를 했다.
죽던 날 아침 8시에 내가 가서 기도해주시고 아내도 신희도 잠시 잠든 것 같아서 병실 문을 나오려고 하는데 신희가 손을 들고 “아빠, 아빠.”부르더니 “기도,기도.”두 마디를 외쳤다. 내가 붙잡고 기도했더니 신희는 다시 잠이 들었다.
마음을 놓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간호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바로 달려가 보니 신희가 숨을 거두고 있었다.
신희는 죽었다. 아내가 신희의 눈을 감겨주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이 들어와산소 호스와 목에다 심장으로 꽂은 주사바늘을 빼냈다.
나는 그 방에서 모두들 나가주기를 청했다. 신희와 단 둘이만 있고 싶었다. 그의 고통은 끝났다. 우선 그것만으로도 내게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의 태엽이 한 가닥 축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신부처럼 주님 품에 안겼을까, 어린 딸로 안겼을까, 나와 자신의 사체(死體)를 바라보고 있을까…
꼭 붙잡고 있는 신희의 손목이 서서히 굳어지며 차가와지고 있음을 느낀다. 종이장같이 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분명 태풍이 지나간뒤의 호수같이 잔잔하다. 지상의 산 사람 얼굴 중에 이토록 성스럽고 가난한 여인의 얼굴이 있을까? 신희는 세상에 살기 위해 온 여인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 일에 너무 어두웠다. 욕심이 없었다. 환상의 여인이었다. 시간이 흐른다. 나는 언어도, 행동도, 존재조차도 정지된 어떤 제로점에 선 것이다.(Be nothing, do nothing, say nothing). 십자가 상의 주님을 쳐다본다. 가시관 밑으로 피가 빗물처럼 줄줄 흐르고 있다.
침묵과 침묵, 주님의 제로와 나의 제로, 주님의 고통과 내 고통, 주님의 죽음과 내 죽음과 신희의 죽음이 만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언어, 행동, 생각, 존재조차 정지된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뒤에 생각해냈는데 나는 주님이 섭섭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냘픈 아이에게 그리고 가혹한 고통을…..‘주여….’하고 부를 힘이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내게는 한 기적이 일어났다. 깊고 깊은 존재의 밑바닥, 주님이 뚫어버린 지하에서 지하수가 솟듯이 세미한 음성으로 한 찬송이 터지고 있었다. 찬송의 영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내 찬송이 아니다. 내 속의 성령이 내대신 부른 찬송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살아계셨다. 그 때 그곳에도 나와 함께 나 위에 계셨다. 성령의 대송이다.
세상 욕심을 묻어비린곳
신희를 유해실에 맡기고 돌아오며 나와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 한다. 뭐라고 설명을 할 것인가? 엄마의 죽음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리다. 더욱이 쇼크와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은 생명의 본능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풀이 죽어 있다. 항상 누군가가 병원에서 엄마를 지켰는데 모두 돌아온 것을 보고 엄마는 어디 두고 다 와버렸는가 묻는다.
“엄마가 너무 아파서 예수님이 데려가셨어.”
“어디로 데려갔지?”
“하늘나라로 데려가셨단다.”
어떻게 올라갔어? 줄을 내려 올려갔어?”
그 말에 답을 안했다.
“그럼, 언제 다시 데리고 오시지?”
“이담에 너희들이 크면 예수님이 오실 때 데리고 오신단다.”
정하는 친구에게. “우리 엄마는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말한다. 수연이는 구름위를 날마다 멍하니 쳐다본다. 다시는 ‘엄마’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영원히 되돌아 올 수 없는 엄마, 불러도 대답 없는 엄마를 두 아이 가슴에 상처없이 신앙으로 승화시켜 부활처럼 되살리기에는 두 아이는 너무 어리고, 우리는 너무도 무지하다. 이사를 갔다. 엄마에게 새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렸느냐고 수연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다. 수연이를 슬그머니 안은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수연이 머리 위로 뚝 뚤어져 흐르는 것을 본다.
신희가 간 지 며칠 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긴 편지였다. “목사님, 저는 신희 언니가 키워주었답니다. 신희 언니가 Y여대간사로 있을 때, 저는 언니를 통해서 주님을 알게 되었고, 개인육성을 받다가 집안 사정으로 그 학교 약대 3학년 때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는데, 작별인사를 했더니 내일 한 번 더 만나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신희 언니는 두툼한 봉투를 주면서 내게는 필요 없는 돈이니 허물말고 등록금과 학비에 쓰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약사가 되었고 믿음좋은 의사와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다. 그 부부는 나와 내 아내를 만나, “언니는 지상의 사람이 아니었어요. 천상의 여인이었어요.” 라고 했다. 젊어서 못다 살고간 여인에 대한 추모와 동정도 있겠지만, 수많은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에게서 나는 신희에 대한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내 속된 세상 욕심을 95%쯤 내세적 소망으로 꽉 채워주고 간 신희는, 주님이 더 사랑해서 더 필요해서 더 좋은 곳으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데려가셨으니 더욱 찬송하기만 할 뿐이다.
공동묘지 길이 언덕밑 귀퉁이 땅에 신희처럼 미안하게 자리잡고 ‘고 김신희의 묘’라고 쓴 동그랗고 작은 무덤이 하나 있다. 나의 세상 욕심도 묻어버린 곳이다.
–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13-24)
– 김준곤목사 (한국대학생 선교회총재)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
“신희는 세상에 살기 위해 온 여인이 아니었다. … 침묵과 침묵, 주님의 제로와 나의 제로, 주님의 고통과 내 고통, 주님의 죽음과 내 죽음과 신희의 죽음이 만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언어, 행동, 생각, 존재조차 정지된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뒤에 생각해냈는데 나는 주님이 섭섭했던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저자인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 김준곤 목사가 눈물로 써 내려간 신간 ‘딸의 죽음 그 존재의 제로점에서’(순출판사)의 일부분이다.
1997년 작은 소책자로, 1998년에는 음반으로 만들어져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이 책이 새로운 디자인의 단행본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 책은 김준곤 목사가 첫째딸 김신희 씨(이대 불문과 졸업)의 위암 투병과정에서 경험한, 주님을 향한 자서전적 신앙 고백 에세이.
불치병인 암으로 싸늘이 식어가는 딸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던, 어떠한 위로도, 기도도 그 공백을 채워줄 수 없었던 아버지로서의 아프고, 섭섭한 속내를 저자는 가감없이 토해 내고 있다.
존재조차도 정지해버린 인생의 ‘제로점’에 맞닥뜨리고서야 비로소 신앙의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임을 저자는 딸의 죽음과 주님의 죽음의 일체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고통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겐 정체성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의 배반당하심. 고난의 지점에 섰을 때에만 비로소 살아오기 때문이다. 1997년 작은 소책자로 발간됐을 때, 여성잡지 Queen에서 이같은 내용을 기사로 연재, 장안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올린 사진들은 <뉴스파워>에서 제공받았습니다.